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사자처럼 불 같은 성격 ===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부친 [[헨리 8세]]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이 원하지 않던 강인한 성격으로, 그녀가 격노하면 신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심지어는 회의 중에 격노한 나머지 [[옥좌]]를 박차고 나가거나 국무대신의 [[뺨]]을 치거나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꽁해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잘못한 후에는 빠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이런 점이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중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던 친척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중요한 차이다. 메리 여왕은 국무회의 중에 중신들에게 반박을 당하기만 해도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서, 자기 방에서 틀어박혀 내내 울어댈 정도로 유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 평상시의 분별없는 행동과 더불어 그녀의 앞길에 내내 방해가 되었으며, 끝내 [[스코틀랜드]] 왕위도 잃고 [[잉글랜드]]에서 자기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친구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는 "다른 군주들의 폭풍과도 같은 분노에 비하면 폐하는 일시적 돌풍에 지나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라는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아마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풀어 버리고 끝내는 성격이었나 보다. 한마디로 불 같지만 뒤끝은 없는 타입. ~~확실히 뺨 한대 맞고 끝나는 것이 목이 잘리거나 모가지가 날라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게다가 체격도 컸으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그녀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여왕의 키가 170cm가 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키도 170cm가 안 되던 시절이다.[* 사실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출신이 아닌 영미권 남성들의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170cm이 조금 넘는 형편이고 6피트(183cm)가 넘어가면 큰 키에 속하는 정도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대통령인데(193cm) 그가 생활하던 때가 1800년대였으니 당시 미국 남성들의 신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말년에도 그 성정은 여전해,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 때 연루되어 변명을 하러 온 해링턴 경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퍼부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과연 헨리 8세의 딸"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자신이 암사자는 아니라도 사자의 새끼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으며,[* [[https://www.historic-uk.com/HistoryUK/HistoryofEngland/Queen-Elizabeth-I/#:~:text=On%20her%20descent%20from%20Henry,I%20am%20but%20barren%20stock.%E2%80%9D|원문]]: "Although I may not be a lioness, I am a lions cub, and inherit many of his qualities." (설령 짐이 암사자는 아닐지라도, 짐은 [[헨리 8세|사자의 자식]]이며, 그의 자질을 많이 물려받았노라.)] 스페인과의 전쟁 당시 포고문에서는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여성에 대한 편견[* 당시로서는 여성은 남성에 비하면 부족한 존재, 남성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편견이 팽배했다. 가정에서는 남자의 말에 순종하며 아이나 잘 낳아 기르는 것이 여자의 가장 중대한 사명이라고 생각된 시절이었다. 그것은 여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신하들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때만 해도 여왕이 곧 적절한 왕족과 결혼해서 왕자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리라고 생각했다. 즉 남자로 왕위가 이어질 때까지의 일종의 [[징검다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추문이 돌거나 [[흉년]]이 들거나 해서 국가에 위기가 올 때면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긴다'는 ~~어이상실한~~ 비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각보다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풍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잘 이끌자 그러한 비난도 사그라들어, 여왕의 사후에는 위대한 여왕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2002년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순위에선 영국 군주로는 가장 높은 7위를 기록했다.]에 가득 찬 신하들은 처음에는 여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나 곧 그녀의 남다른 판단력과 정치력에 감복하여 여왕을 칭송하였다.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서 [[승마]]와 [[사냥]]을 즐겼으며 매일 강도 높은 운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궁전의 회랑이나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춤]], 특히 갤리어드(춤곡의 일종)를 즐겨 추었고 사망하던 해에 이르기까지 코란토 춤을 시연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경질적인 면도 많았고 무척 까다로운 성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신중함이 너무나 지나쳐서, 중대한 일은 일단 '''무조건 결정을 미루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워낙 이런 식으로 결단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더러 있다.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잠재적 반역자였던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메리 여왕]]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매번 그 결정을 미루기만 하자 진저리를 치며 "여왕 폐하의 우유부단함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벌리 남작이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과도하게 견제했던 이유도 결국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식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니 이렇게 진저리를 칠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